80년대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딴 

카타리나 비트에 대한 ESPN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카타리나 비트와 피겨스케이팅을 

냉전체제의 시각에서 재조명할 듯 싶었는데, 역시 그랬다.



"The Diplomat," Documentary film about Katarina Witt just began at ESPN. (ET 8pm~9pm) 

"외교관" 카타리나 비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동부시간 저녁 8시부터 ESPN 채널에서 방금전 시작되었다.


이렇게 트윗을 날리고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카타리나 비트의 다큐멘터리는 잊고 있었던 

지구촌 영상음악과 미군방송 AFKN에서 보여주던 듀란듀란의 뮤직비디오의 색감과 

87년 봄 어느날 갑자기 난데 없이 방학이라며 서울에 올라와서는 

매일 어디론가 나갔다가 밤 늦게야 돌아오던

대학생 사촌형의 몸에서 나던 매운냄새를 되살려 주었다.


인터넷 곡괭이질로 찾은 1987년 지구촌 영상음악의 박혜성과 엘비스 프레슬리 영상

80년대 하면 떠오르는 바로 이런 색감인거지. 듀란 듀란 뮤직비디오 New Moon on Monday


다큐는 대략 피겨 스케이팅 버전 "백야"와 "타인의 삶"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카타리나 비트는 말한다. 

그 많은 모순과 동독 경찰의 자신의 대한 감시에 분노하면서도, 

자신이 동독에 없었다면 아마도 피겨를 배우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사진 출처: http://www.imdb.com/title/tt2788620/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동독의 엘리트 운동선수들이 수당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온국민의 영웅이던 비트 역시 가난에 고통받는 국민들을 외면한 파렴치한으로 비난받는다. 

비트는 동독이 처음으로 인정한 공식적인 프로 운동선수였다.


비트는 20년동안 아이스쇼에서 활동하였다. 

한편으로는 중요한 것은 개인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일 통일 후 비트는 올림픽에 다시 참가했고,

2018 뮌헨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이 되었다.



동독 비밀 경찰에 협박당해 비트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페어 스케이터 잉고 스토이어는 

가장 어두운 과거이고 후회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만약 협조하지 않았다면 자신의 스케이터로서의 커리어는 끝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독 비밀 경찰에 협력한 것은 제 인생의 오점입니다. 하지만 지울수는 없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비밀경찰이 내민 협조 동의서에 싸인하지 않았다면, 

나는 세계챔피언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코치도 못하고 있을 거에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80년대 동독 비밀경찰의 민간인 감시를 그린 영화 "타인의 삶"의 예고편,

음반 프로듀싱을 하는게 아니라 도청중. 뭐 동독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동독 비밀 경찰 자료 보관소에서) 카타리나 비트에 관한, 27개의 박스 안에 3,500 페이지에 달하는 감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중 오직 181 페이지만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동료를 배신했던 잉고 스토이어는 

비밀경찰에 협력한 과거 때문에 국가대표 코치직을 물러났다.

하지만, 그가 지도한 알레오나 사브첸코/ 로빈 졸코비는 다른 코치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졸코비가 자신이 몸담았던 독일군의 후원을 잃으면서까지,

코치의 곁을 지키고 결국 이들은 법원에 항소해 

밴쿠버올림픽에서 스토이어는 독일 대표팀의 코치로 참가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비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비트는 1984년 사라예보 올림픽에서 강력한 경쟁자 미국의 로잘린 섬너스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금메달을  딴다.


비트는 사라예보 올림픽 우승 후 세계선수권 마저 우승하고, 

은반의 여제가 된다.

하지만 비트는 다음 올림픽까지 은퇴할 수 없었다.

아마츄어 은퇴는 프로가 금지된 동독에서 은반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


비트의 코치 유타 뮬러가

직접 피겨를 가르친 딸 가브리엘 자이페르트는

2회 월드챔피언(69.70)이 되었고 올림픽(68)에서 은메달까지 땄지만,

아마츄어 은퇴후 프로 활동을 금지한 동독정부의 정책 때문에, 

결국 은반을 떠나야 했다.


유타 뮬러 Jutta Müller 코치와 그녀의 딸 1968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가브리엘 자이페르트 Gabriele Seyfert


딸의 좌절을 곁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유타 뮬러는 

캘거리 올림픽 전 

비트의 꿈을 위해 동독정부와 협상을 한다. 


뮬러 코치 그리고 카타리나 비트



동독정부는 조건을 건다. 

바로 비트의 올림픽 2연속 금메달


자유로의 티켓을 위해 비트는 

캘거리 올림픽 링크에 선다.


(소냐 헤니 이후) 52년동안 어떤 여자 싱글 스케이터도 2연속으로 올림픽 챔피언이 된 적이 없었다. 





사진 출처: http://www.imdb.com/title/tt2788620/  © Verwendung weltweit


http://www.thedailybeast.com/witw/articles/2013/08/06/the-diplomat-on-espn-katarina-witt-the-most-beautiful-face-of-east-german-socialism.html  (c) Daniel Janin/AFP/Getty



올림픽 공식 기록 영화 (카타리나 비트 경기 영상 부분 및 시상식)


결국 소냐 헤니 이후 처음으로 이룬 여자싱글의 2연속 금메달은 냉전의 산물이었던 것. 

그리고 비트에게 있어서는 자유로의 티켓이었던 것. 


미국에 망명했다가 다시 소련에 의해 억류된 소련 발레리노와 소련으로 망명한 미국 댄서의 우정을 그린 

영화 "백야" (1985) White Nights. 주제가 Say You Say Me로 더 유명한 영화였다.

그나저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그레고리 하인즈, 이자벨 로셀리니 젊은 거 봐라...


카타니라 비트는 냉전체제에서 동독과 공산권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역할을 떠맡은 

체제 선전을 위한 외교관 "The Diplomat" 이었던 것이다.








다큐의 마지막에 비트가 뮬러 코치가 가르치는 링크를 찾아 이렇게 말한다. "링크에 가면 항상 좋다"

비트와 뮬러 코치는 가장 친한 친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링크에서 두사람이 팔을 걸치고 나란히 서서 

뮬러의 현재 제자들을 지켜보는 것을 보여준후, 




사진 출처: http://www.imdb.com/title/tt2788620/


카메라는 빙상장의 하늘을 비추고, 

그 위에 비트, 뮬러 코치, 스토이어, 슈타지 관계자의 현재를 알리는 자막이 흐르며 다큐는 끝난다.


비트가 연습하던 켐니츠 링크의 현재


카타리나 비트는 프로 스케이터로 20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다.


유타 뮬러는 피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코치중 한명으로 남아 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은퇴한 후 잉고 스토이어는 켐니츠 아이스 링크에서 세계챔피언들을 길러냈다.


에곤 크렌즈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멤버)는 냉전시대 범죄 혐의로 6년 6개월 복역을 선고받았다.


분단 45년만에, 동독과 서독은 1990년 10월 3일 통일되었다.


카타리나 비트는 통일된 독일을 대표하여 1994년 그녀의 세번째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2018 뮌헨 동계 올림픽 유치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ps.1 서울올림픽, 사촌형 그리고 베를린 장벽


다큐에 등장하는 80년대의 서독과 동독, 무너진 베를린 장벽을 보면서 

오래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촌형은 대학신입생 때 학교 앞 음악감상실에서 DJ를 하다가 학사 경고를 맞고 대학을 잘린 후

서울에 올라와 우리집에서 노량진의 재수단과반을 다니며 대학입시를 다시 준비하고 있었다.

F.R. David의 "Words"를 기타를 치며, 

팝송은 미국에만 있는게 아니라고 이야기한 후

알제리 출신 프랑스 가수의 노래를 서툰 영어로 나에게 불러주고는 했다..



워즈 돈컴이지 투미 하우캔 아이 파인드 어 웨이

투 매이크유 시 아이러뷰 워즈 돈컴 이지


형 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듀란듀란 보다는 아하의 팬이었다. 



두번째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찾아온 형은 팝송이 아닌 다른 노래를 불러주었다.

하지만, 87년 봄, 형의 매캐한 냄새가 어쩌면 담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중에 내가 형의 나이가 되서야 알았다.


서울 올림픽에서 싸인을 받았던 

동독 여자 수영선수들의 금메달과 신기록들이 

체제 선전을 위해 엘리트 체육을 육성하며

기록 갱신을 위해 약물을 주사했던 냉전의 어두운 진실이라는 것도





"스포츠는 국가를 선전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서울 올림픽 대회 유치 자체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그 선수들의 나이가 되서야 알았다.



20년이나 흘러 "라면 먹고 뛰었다"는 건 임춘애 선수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국가대표에게 금지 약물을 주사했던 동독에 비하면, 

영웅을 만들기 위한 "라면소녀" 과장보도는 그래도 귀엽다고 해야할까나..

관련포스팅 링크: http://dunpil.tistory.com/75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사진 출처 및 추천포스팅: 내가 기억하는 1988년 88올림픽의 추억 10가지


결국 미래가 자신들의 편이라던 공산주의 동독은 5년도 지나지 않아 몰락했고 

동독의 엘리트 선수들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한편, 88올림픽을 유치하고 서울의 판자촌을 절단냈던 독재자는 

아직도 벌금을 안내고 88대고 있다.


카타리나 비트의 인터뷰를 보며 누군가가 계속 오버랩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같은해의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던 뮌헨과 평창의 평행선 처럼...

수십년간 분단되어 서로 왕래할 수 없었던 베를린 장벽과 DMZ처럼... 

국가와 엘리트 스포츠 선수의 그 애증의 관계 역시...


그럴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더 이번만은 그녀가 그녀 자신을 위해 스케이팅 하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한다.


ps. 2 피겨 스케이팅


피겨 스케이팅 장면이 생각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쏠쏠한 장면들이 꽤 있다.


카타리나 비트의 진솔한 인터뷰는 기본이고,


어린시절 연습 영상은 물론,




잉고 슈토이어 코치의 현재를 보여주면서 사졸네 연습장면이 등장할 때는

유심히 보면서 무슨 프로그램일까 생각하고 있는데...컷트 -_-




그리고 유타 뮬러 코치와 브라이언 보이타노가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유타 뮬러 코치는 이렇게 말한다. 

"피겨 스케이팅은 제 인생입니다. 제 인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카르멘 온 아이스 촬영은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영화 세트가 만들어졌고, 집시마을에 가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기도 했죠."


캘거리 올림픽 이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스페인에서 "Carmen on Ice"를 찍는 메이킹 필름도 조금 보여주기도 했다.

카르멘으로 분한 카타리나 비트를 두고 브라이언 보이타노와 브라이언 오서가 제2의 

브라이언의 전투 (Battle of Brians)을 벌이는, 전체 장면이 모두 피겨 스케이팅으로 촬영된 영화



냉전체제의 시각에서 바라본 피겨 스케이팅 스타 카타리나 비트의 다큐멘터리

"The Diplomat" 

나중에 한국에 방영하거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면 

꼭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반드시 피겨 스케이팅 팬이 아니더라도...


사진 출처: http://sportsillustrated.cnn.com/more/news/20130426/katarina-witt-the-diplomat/


http://www.girlsofsportsblog.com/2013/08/katarina-witt-figure-skating.html



ps. 3 활자

1985년 3월 27일 동아일보


1985년 3월 30일 동아일보


1988년 2월 29일 동아일보


1988년 11월 5일 매일경제


1989년 11월 22일 동아일보


1989년 12월 23일 경향신문



1993년 11월 26일 경향신문


1993년 12월 15일 한겨레


1994년 1월 11일 경향신문



1994년 4월 4일 동아일보


1996년 7월 3일 경향신문




ps. 4 Words


사실 트위터에 간략하게 쓰기 시작한 것이 이 포스팅의 시작이었다.

역시 트위터는 다큐 리뷰 따위를 쓰는데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법 많은 문장을 잘라서 트위터에 쓴 다음에야 다시금 알게 되었다...쓰업...

어쩌면 내가 트위터에 원래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리고 이제 이글은 피겨 블로그에도 맞지 않는 글이 되어 가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생활에 지쳐가다 연락이 끊겼던 사촌 형이 

몇년동안 행방불명 된 후 다시 연락이 되었을 때

형은 이제 어떤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구촌 영상음악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알 수 있을까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요.


이것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당신을 위해 내가 만든

소박한 노래에요.

사랑한다고 말할 때

숨겨진 의미 따위는 없죠.


하지만 쉽지 않아요.

나에게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