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이번 시즌이 끝났습니다.

세계선수권 여자 프리 경기가 끝나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1년 전 겨울 한국에 돌아갔을 때

부모님 댁의 서랍장에서 

비디오 테이프들을 찾았어요.


버리지 않아서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지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던

오래된 비디오 테이프였죠.


미국에 돌아와

제가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하게 된 바로 그 경기들을

20년만에 다시 보면서

예전의 그 감정을 조금이나마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가 출전하는 

캐나다 런던의 세계선수권 직관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여행을 갔다와서도

다시 그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죠.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결심했던 것이 있습니다.

어떻든 제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

블로그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가을 그랑프리 시즌이 시작되기 전

블로그를 중단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부상을 당했고,

저도 모르게

다시 강제소환되었습니다...

어느새 포스팅을 하고 있더군요.


제 피겨팬 친구들은

"횽..거봐요...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등등의 이메일을 보내왔죠.


다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한가지 결심했어요.


이왕 다시 시작한거 

무슨 일이 있든지,

이번 시즌을 끝까지 포스팅하겠다고.

그래서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고...


무슨 일이 있든지...


러시아의 피겨 스케이팅은 저에게 첫사랑과도 같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것이

카타리나 비트였다면,

카타리나 비트 다큐멘터리 - "The Diplomat"

피겨쥬크박스 - 카르멘의 전쟁 혹은 카타리나 비트 


피겨 스케이팅의 바로 "그 순간"을

느끼게 해준 것은

바로 이른바 G & G

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 / 세르게이 그린코프의 페어 경기였습니다.

 

 

 

 

 

 

http://www.canada.com/olympics/gallery/figure-skatings-most-romantic-programs-and-couples

 

 

(c) Clive Brunskill/Getty Images

 

1994년 릴리 함메르 올림픽의 그 경기들을 

비디오 테이프로 두번씩 녹화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돌려봤지요.

바로 지난 겨울에 찾았던 그 비디오 테이프였습니다. 

 

 

 

제가 페어팀들에게 여전히 

그렇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것은

그리고 페어경기가 언제나 저에게 특별한 것도...

그렇습니다.

피겨 스케이팅 팬으로서

첫사랑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소치 올림픽에서

알리오나 사브첸코 / 로빈 졸코비의 프리 경기중

졸코비가 넘어질 때 들리던 

러시아 관중들의 신나는 박수 소리는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너무나 황망하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페어의 찬란한 전통을

러시아 관중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을 치면서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죠.


피겨 팬들의 가슴속에 어쩌면 영원히 간직되었을

러시아 피겨의 빛나던 금빛 전통을

그들은 지금 당장 손에 쥘 

싸구려 도금 메달과 바꾸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직감했습니다.


여자 싱글 경기도

그리 다르지는 않겠구나.


그래서 여자 프리 결과가 발표된 후

담담하던 김연아 선수의

표정만큼이나 

저도 오히려 담담햇습니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피겨에 대한 첫사랑의 기억을 

20년이나 지난 후에

조금씩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죠.



지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포디움의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것을 

캐나다 런던의 링크에서 직접 본 순간

피겨 스케이팅 키드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2013 세계선수권 직관기 "언젠가 말하겠지, 그곳에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피겨 스케이팅 키드는

변방에서 온 이상하고 호기심 넘치는 

어색한 주변인에 불과합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북미의 어느 곳에서,

피겨 스케이팅 다큐멘터리를 보러 갔을 때

매진된 극장의 어두움 속에서도 이상하게 느낄 수 있었던, 

그리고 지역대회의 링크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다시 자각하게 되는,

나를 바라보는 그 불편한 시선들

어제 "Rise"란 미국 선수들에 대한 다큐를 봤는데..


힘들고 길었던 시즌을 돌파한 지금,

이것이 스케이팅 키드의 졸업식이 될지 

아니면 성인식이 될지는 아직 알수 없습니다.


언젠가 예카테리나(카티야) 고르디예바가 두 딸과

공연을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세기의 사랑을 남겼던 카티야가 상처를 딛고,

일리아 쿨릭과 만나 새로 사랑에 빠지고

다시 아이를 낳고,

두 자매들이 어머니와 함께 은반 위에 선 것이었죠....

세그게이 그린코프의 기억과 일리아 쿨릭의 현재는 

카티야와 함께 그렇게 은반위에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국제대회에 한국의 스케이터들을 응원하러 갔던

2012년 여름, 레이크 플레시드의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예전의 기억과 마주쳤습니다.

2012 주니어 그랑프리 에필로그 - 레이크 플레시드에서 배운 것들 


레이크 플레시드 올림픽 센터 링크 복도에 걸려있는 세르게이 그린코프를 추모하는 팬들이 만든 액자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돌아 와서

고르디예바의 최근 영상들을 다시 찾아 봤습니다.


카티야의 옆에 일리아 쿨릭이 있는 영상들이 

여전히 낯설었지만 

처음으로 그 영상들을 끝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 

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와 일리아 쿨릭의 딸인

엘리자베타 쿨릭이 어느새 성장하며 

미국 내셔널 지역예선에 나온 영상을 보게 되었죠.


링크에 발을 딛는 그들의 딸을 

카티아와 일리야 쿨릭이 지켜보고

저 역시 그러한 그들 가족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떻든 

시간은 그리고 인생은 계속 됩니다.


얼마전 해외의 피겨 소식을 통해

10 여년이 넘게 같이 해온

살아 있는 전설, 사브첸코/졸코비도 

졸코비의 은퇴에 따라

사브첸코 역시 다른 파트너를 찾아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핑으로 출장 정지되었던 유리 라리노프,

그리고 그를 1년이 넘게 묵묵히 기다렸던 베라 바자로바도

이번 세계선수권 이후 각자의 길을 갈 것이라는 소식도...

떠나간 반쪽을 그리며 - 아쉽게 해체된 아댄과 페어팀들


저도 어느새 그런 것들을 이해할 만한

시간들 위에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에게 가장 중요한 현재를 위해

또 살아가겠지요.

피겨쥬크박스: 셸브루의 우산, "빗물처럼 슬픈 사랑"


왠지 모르게 지난 겨울 발견하고도 

1년이 넘게 올리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올리지 않았던,

그 경기들을

이제는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MBC)

 

 (CBS - AFKN)

 

 

언젠가 한국 페어팀이 은반위에 서는 날

어쩌면 피겨 스케이팅 키드의 꿈은

또다시 되살아 날지도 모릅니다.

피겨 스케이팅 키드의 생애와 오마쥬 투 연아


논바닥을 메워 만든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오뎅을 먹으며 즐거워 했던 것처럼


처음 개장한 실내 링크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신고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롯데월드 링크의 추억 그리고 레베카와 키릴


1994년 어느날 페어 경기를 보고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어느 여름, 태릉에서 첫 컴피 직관을 하며

영상이 아닌 링크 사이드에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처럼...

 

그것이 야오빈 / 루안보의 첫경기 처럼 

힘겹고 어려운

데뷔 무대가 될지라도...

 

지금 어디선가 그들의 꿈을 키우는

한국 스케이터들을



 


 

그리고 잠시 여행을 끝내고,

또 한번의 중요한 1년을 보내게 될

제 자신을 응원합니다.


 

에필로그)


참고로 다음 시즌부터는 가사 있는 음악이 

그동안 허용되었던 아이스댄스뿐만 아니라 

싱글과 페어 스케이팅 에도 허용됩니다.


제가 주목하고 있는 음악들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나온 

빛나던 한국의 가요들입니다.

피겨 쥬크 박스 - K Pop 열풍 그리고 90년대 빛나던 한국 가요들


그 중 한곡입니다.


노래의 가사가 

최근의 피겨 스케이팅을 염두에 둔건 

절대 아니에요....


응답하라 1994...한 사람을 위한 마음



힘들게 보낸 나의 하루에 짧은 입맞춤을 해주던 사람

언젠가 서로가 더 먼곳을 보며

결국엔 헤어질 것을 알았지만...

너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나를 어렵게 만드는 얘기들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나?

너를 잊겠다는 거짓말을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언제오더라도 너만을 기다리고 싶어


다시 처음으로 모든걸 되돌리고 싶어.

이제는 어디로? 나는 어디로?


아직 너의 그 고백들은 선한데.

너를 닮아 주었던 장미꽃도 한사람을 위한 마음도

모두 잊겠다는 거짓말을 두고 돌아오긴 했지만....


...


"일본은 물가 억수로 비싸다더라..."


"나는 니가 한번씩 텔레비젼에 나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한번씩 뉴스에 나오는 거 보면..."


"착해서 망했잖아. 착해서 망했어....너무 착해서...에라이 병신아...

너 한테 하는 말 아니야. 나한테 하는 말이야..."


"불편하고 어색하지. 그래도 싫은 건 아니다."


"인제가 아니라 이제"


"니는 무조건 잘 될기다...니가 제일 어른스럽고 착하쟎아."

...

"눈온다...밖에 눈온다" 


밖에 눈온다...

3월 마지막 주인데...젠장...미국 북동부..,

남겨두었던 술 한잔 하고 싶네요...

2월말 올림픽이 끝나고 결국 따서 마셨던 


3년 동안 따지 않고 아껴두었던 소주입니다....


"소주 한잔 정도는 할 수 있지?"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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