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김레베카/키릴 미노프 팀이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프리컷을 통과하면서 20위를 기록했습니다.


최근 20년간의 한국 아댄 국제경기 도전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선배 한국 아댄팀들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입니다.

이 당시에는 24위가 프리컷 통과 기준이었습니다.


양태화 / 이천군


1996 24

1997 25  (29위였으나 주니어 월드가 서울에서 열려 주최국 자동 프리컷 통과)

1998 21  

1999 28 

2000 20 


김혜민 / 김민우


2002 27 

2003 27 

2004 25 


한국 아댄팀의 올림픽 참가

2002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에 참가한

양태화 / 이천군 팀이 유일합니다.



우선 양태화 이천군팀은 주니어 그랑프리가 생긴 후 처음으로

결성된 주니어 아이스 댄스 팀이었습니다.


이들의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

대표선수 선발전 이후의 사진과 기사입니다.



경향신문 1995년 11월 2일 16면


이 당시에는 세계주니어 선수권 대회가 11월 말에서 12월에 열렸는데,

양태화 / 이천군 팀은 24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열린 1996-1997 시즌 세계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는

29위를 기록했으나, 개최국 자동진출에 의해 프리 댄스에 진출합니다.


이들은 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여

피겨 스케이팅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차지합니다.



한겨레신문 1999년 2월 6일 13면


이들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은 이후 곽민정 선수가 싱글에서 동메달을 따기까지 

피겨에서 유일한 아시안게임 동메달이었습니다.


기사링크: '한국 피겨 첫 AG 메달리스트' 양태화 "후배 민정아, 고마워"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습니다.

한달 뒤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오리지널 댄스에 진출했으나 프리컷에서 탈락

최종 32개팀중 31위를 기록합니다.


동아일보 1999년 3월 25일 40면


이들은 한국 아댄팀 사상 최초로 

1999년 두번의 주니어 그랑프리에 출전했지만 

JGP 일본과 JGP 노르웨이에서 참가팀 중 최하위를 기록,

각각 9위와 15위에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1999 JGP 일본: http://ww2.isu.org/figure/events/9900/jgp89900.html

1999 JGP 노르웨이: http://ww2.isu.org/figure/events/9900/jgp79900.html


하지만 양태화 / 이천군 팀은 

류종현 코치의 지도아래 꾸준히 실력을 향상시키며,

2002년 솔트레이크 플레시드 올림픽에 진출,

한국 아이스 댄싱의 이정표를 세웁니다.

한국 아이스 댄싱 사상 최초의 올림픽 진출이었을 뿐만 아니라 참 드라마틱했는데요.


이들은 2001년 초에 열린 시니어 세계선수권에서 31위를 기록,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합니다.


올림픽 추가 예선전이었던 2001년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에서

한 등수 차이로 다시 실패하죠.

하지만, 출전권을 획득한 팀이 출전권을 포기

대회 직전 극적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에서 세계의 벽을 실감하며 

24개팀 중에 24위를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아댄 사상 최초의 올림픽 출전이자 마지막 출전이었죠.


기사링크: [솔트레이크 스타]이천군-양태화 커플 '아름다운 골찌'






2002년 솔트 레이크 올림픽에 출전한 양태화/이천군 팀 (c) Getty Images



이후 양태화/이천군 팀은

올림픽 직후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23위를 기록한 후 


양태화 선수는 은퇴, 

이천군 선수는 새로운 파트너를 찾게 됩니다.


양태화 선수는 현재 코치를 하면서 국제대회에서 테크니컬 스페셜리스트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김연아의 키스앤 크라이"에서 안무를 담당하기고 했고, 

지난 올댓 섬머에서는 오랜만에 링크에서

개그만 김병만씨와 함께 강남 스타일에 맞춰

멋진 타잔 댄스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천군 선수는 미국 파트너 케이트 슬래터리 Kate Slattery 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천군 / 케이트 슬래터리 팀은 미국에서 훈련을 시작합니다.


이천군 선수와 슬레터리 선수는 한국을 대표하고 싶었고,

지금은 변경된 그리고 변경 덕분에 레베카 / 키릴 팀이 한국을 대표하게 된 

외국인 국가대표 불가 규정에 묶여 미국을 대표하여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이 규정 때문에 슬래터리 선수가 한국국적으로 귀화까지 추진했지만 실패하는 등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을 대표하고 싶어했던 팀이라 더 아쉬웠던 경우입니다.


이천군/케이트 슬래터리 선수는 3년동안 팀을 이루면서

2005년 미국 내셔널에서 7위,

2007년 미국 내셔널에서 11위를 했습니다.


미국 내셔널 연습 과정에서 충돌을 해서 부상을 당한 후에도 프리 댄스를 마친 영상이 유튜브에 있네요.



케이트 슬레터리/이천군 팀은 미국 국내 대회 뿐만 아니라,

2006년에는 미국을 대표해 국제 대회에 출전,

네벨혼 트로피에서 8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천군 선수는 은퇴후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 스케이팅 클럽에서 

아이스 댄스 코치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 90년대말서부터 

김혜민 / 김민우 남매 아댄팀이 결성되었습니다.




경향신문 1999년 2월 13일 12면


2002, 2003, 2004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를 참가했고,

2004년 4대륙 선수권에 시니어로 참가하기도 했는데요.

2006년 4대륙선수권을 끝으로 은퇴를 합니다.





이후 동생인 김민우 선수는 코치로 활동하던 중 

200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뇌사 상태에 빠진 후 6명에게 장기를 기증하였죠.


이것이 지금까지 한국 아이스댄스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 8년이 흐른 후

신체점제 국제 무대의 첫 한국 아이스 댄서로

김레베카/키릴 미노프팀이 그 이야기를 다시 써나갑니다.


6년 반만에 국제무대에 다시 등장한 한국 아댄. 2012년 9월 주니어 그랑프리 크로아티에 출전한

김레베카/키릴 미노프의 쇼트댄스입니다.



그리고 9년 만의 주니어 세계선수권 참가.


김레베카/키릴 미노프의 주니어 월드 쇼트댄스 (출처: ice-dance.com)





*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활약했던 다른 팀들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한국팀이 선을 보인 것은

박경숙/한승종 팀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첫 한국아이스 댄싱팀이었죠.


1986년 동계체전 경기 [동아일보 1986년 2월 20일 9면]



1952년 아이스 댄싱이 처음으로 세계선수권에 채택된 이후

1986년 한국 아이스 댄싱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선수권에 참가했습니다.



세계선수권 피겨 대표 선발 기사, 한국 최초의 아이스 댄싱 월드 출전 대표팀 선발이었습니다. [경향신문 1986년 1월 17일 8면]


이들은 1986년, 1987년 2년 연속으로 출전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최하위를 기록합니다.


1987년 세계선수권 피겨 대표 선발 기사, [매일경제 1987년 2월 10일 12면]


하지만 박경숙/한승종 팀은 3번째 출전한 

1989년 대회에서 24팀중 22위를 기록합니다.


이후 이들이 닦아 놓은 길을

박윤희/류종현,  (1991 세계선수권 - 26개팀 중 26위, 1994 세계선수권- 36팀중 32위)

김연아 선수의 코치를 맡고 있는 그 류종현 코치님 맞습니다. ^^;



1990년 동계체전 경기, [경향 1990년 2월 21일 11면]



정성민/정성호  (1992 세계선수권 - 33팀중 32위)



미국교포인 정성민/정성호 팀이 박윤희/류종현 팀을 제치고 1992 세계선수권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선발과정에서 이의제기가 나왔었는데요. 국가대표 선발에 관해서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듯.

재미있는 사실은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선수권에 참가한 한국 페어팀이 있었습니다.

최정윤/이용민 팀입니다.

[한겨레 1991년 12월 24일자]



그리고 양태화/이천군 팀과 함께 활약한

김희진/김현철 남매팀 (1996 세계선수권 - 33팀 중 33위)이 있었습니다.



* 2000년대 아이스 댄싱 팀 


김혜민/김민우 팀과 함께 활약한

최선영/이규철


그리고 2000년대 후반

한국을 대표하려 했지만 규정 때문에 좌절하고

결국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게 되었던

유선혜 선수 등이 있습니다.


김현철 코치와 최선영, 유선혜 선수는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에도 출연하기도 했죠.


끝으로 박동희 기자가 정리한 한국 아댄 역사 관련 기사가 있어서 링크합니다

(야구 전문 기자 박동희 기자가 스포츠2.0 시절 야구 스토브시즌에는 피겨 기사도 썼더군요. 

옛 여자친구가 피겨 선수였데요..)

은반위의 댄서 유선혜


* 일단 여기까지...^^;

 

업데이트)

 

한국 아이스 댄스팀의

시니어 세계선수권 참가 기록을 정리해봤습니다.

 

연도 선수명  순위/참가팀 수

1986  박경숙 / 한승종 22 / 22 <== 프리댄스 진출 * 24위까지 프리댄스 참가

1987  박경숙 / 한승종 22 / 22 <== 프리댄스 진출

1989  박경숙 / 한승종 22 / 24   * 20위 까지 프리댄스로 변경

1990  박경숙 / 한승종 27 / 27

1991  박윤희 / 류종현 26 / 26

1992  정성민 / 정성호 25 / 26   * 24위까지 프리댄스로 재변경

1994  박윤희 / 류종현 32 / 36

1996  김희진 / 김현철 33 / 33

1999  양태화 / 이천군 31 / 32

2001  양태화 / 이천군 31 / 35

2002  양태화 / 이천군 23 / 28 <== 프리댄스 진출

2003 ~ 2014 불참  * 2010 월드 부터 20위까지 프리댄스로 재변경

2015  김레베카 / 키릴 미노프 26 / 30

2016  김레베카 / 키릴 미노프 25 / 30

2017  민유라 / 알렉스 겜린 20 / 32 <== 프리댄스 진출


ps.


포스팅을 하다가 익숙한 이름을 발견해서 "그래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첫 은사이자 현 코치인 류종현 코치님...^^; 


류종현 코치님이 아이스댄서 선수 출신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이름을 보게 되니 참 새롭더군요.


김연아 선수의 유려한 스케이팅이 그 시작점이 있었던거죠.


미국피겨의 경우 싱글 선수들도 어려서부터 

스케이팅 향상을 위해 아이스댄스 연습을 병행한다고 하더군요.

 

지금 노바이에서 아이스 댄서로 훈련하고 있는

민유라 선수도 그러던 중 아이스 댄서로의 재능을 발견해서

아이스 댄싱을 싱글과 병행하며 잠시 쥬베니엘 레벨의 아이스 댄서로 내셔널에 나가기도 했구요.

그 후 다시 싱글에 전념했지만 

국 나중에 전문 아이스 댄서로 전환하게 되었죠.


우리 주니어 선수들이 고생하는 PCS의 돌파구는 

물론 일단 심판의 공정한 판단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또한 아댄연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스케이팅 스킬 향상 이외에도

아이스 댄스는 어려운 점프등이 없고

따라하기 쉬운 패턴댄스 등이 있어 취미피겨로 다같이 즐길 수 있어,

생활 체육이라는 의미에서 북미에서 많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볼륨댄스 배우듯이 배울 수 있구요.

굳이 파트너가 없더라도 싱글 댄스 컴피티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아이스 댄스는 

북미의 아댄팀이 포디움을 쓸기 전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미에서 피겨의 꽃 여자 싱글이 퇴조하고

아댄에서 포디움을 휩쓰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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